강달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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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달모 | |
姜達模 | |
없음 | |
1909.4.4~1975.9.16 | |
전남 나주 남평 동사 197 | |
남평 대교리 141 | |
나주, 광주 | |
학생운동 | |
1920년대 후반 | |
애족장(1990) |
공적내용
"전남 나주 사람이다. 광주사범학교 재학중 1927년 4월에 당시 민족차별 교육을 일삼던 일본인 교유(敎諭) 강전(江田)을 타교로 몰아내는 데 참여하였고, 1928년 3월에는 선배들의 졸업에 이어 교내학생운동의 간부로 선임되어 활약하였다. 1929년 5월에는 장석천(張錫天)·김기권(金基權)·김보섭(金普燮) 등과 함께 학생소비조합의 설치에 대하여 협의하였다.
한편 광주지역의 중심적 항일학생결사인 성진회(醒進會)가 1927년 3월에 형식상 해체된 후 항일활동이 학교단위로 분산되어 1929년 6월 동경에서 돌아온 장재성(張載性)의 주장에 의하여 각학교 학생 대표들은 독서회중앙본부를 조직하였다. 이 때 그는 윤창하(尹敞夏)와 함께 재정부위원으로 선임되어 동회의 회비 징수 및 회계 사무를 맡았다. 또한 독서회 중앙본부는 그 하부조직으로 각 학교 독서회를 설치하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1929년 7월에 수피아여학교 뒷산에서 송동식(宋東植)·이신형(李信珩)·김재용(金在瑢) 등과 모여 비밀결사의 조직에 대하여 협의하고 동년 9월 광주형무소 뒷산에서 다시 모여 광주사범학교독서회를 조직하고, 부서 및 결의사항을 정하였는데 그는 재정부위원장으로 선임되었다. 그리고 동월, 독서회인 항일의식을 고취시키기 위한 인쇄물을 임종근(林鍾根)으로부터 교부 받아 이를 각 독서회원에게 배포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독서회를 중심으로 활약하다가 1929년 11월 3일 광주학생독립운동이 일어나자 이에 참가, 활동하였다. 이로 인하여 일경에 피체되어 모진 고문을 당하다가, 1930년 10월 광주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 6월형을 언도 받았으며, 1931년 6월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2년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자료
"판결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