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교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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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교풍 | |
金敎豊 | |
없음 | |
1857 ~ 1908.02.23 | |
전라남도 나주 道林 石岩 | |
全南 羅州 道林 石岩 | |
무장,고창,법성포, 장성, 나주 등 | |
의병 | |
1900년대 중후반 | |
애국장(1996) |
공적내용
"전남 나주(羅州) 사람이다. 1908년 김률(金聿)의진에 참여하여 활동하다가 전사 순국하였다. 김률은 1906년 10월 5일 형인 김태원(金泰元:金準)과 함께 나주에서 봉기하여 활동하였다. 그는 기삼연의 문하생으로, 1907년 9월 기삼연을 중심으로 김용구(金容球)·김태원·이석용(李錫庸)·전해산(全海山)·심남일(沈南一) 등이 연합하여 결성한 호남창의맹소(湖南倡義盟所)에 가담하여 주력으로 활동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김태원과 함께 무장(茂長)·법성포(法聖浦)·고창(高敞)·장성(長城) 등지에서 일본군과 격전을 벌여 큰 전과를 올렸다. 특히 1907년 10월 29일에는 고창에서 일본군을 격퇴하였고, 같은 해 12월 7일에는 법성포 순사주재소를 습격하여 무기를 노획하여 무장을 강화하고, 그곳 사창(社倉)을 점령하여 저장되어 있던 양곡을 압수하여 군량미로 충당하였다. 그리고 그는 190년 1월 3일 100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함평(咸平) 순사주재소를 공격 점령하여 무기와 금품을 노획하기도 하였다. 같은 해 1월 22일에도 그는 기삼연 의병장과 합동하여 400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재차 함평 순사주재소를 습격하여 일본인 파다야(波多野) 순사를 사살하기도 하였다. 같은 해 2월 2일 기삼연 의병장이 피체되어 순국한 뒤, 그는 김태원과 함께 기삼연의진의 주력부대를 지휘하며 광주 곳곳에서 일본군을 유격전술로 공격하여 전과를 올렸는데, 특히 창평(昌平)에서 길전승삼랑(吉田勝三郞)의 기병대를 공격하여 이를 대파하기도 하였다. 김교풍은 이와 같은 김률의진에 소속되어 70여명의 군사들과 함께 전남 함평(咸平) 등지에서 활동하였다. 그러나 1908년 2월 영산포(榮山浦) 헌병분대 및 나주 경찰대 소속 일경과 교전 중 전사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6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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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韓國獨立運動史資料(國史編纂委員會) 第10輯 72·73面