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보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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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보섭 | |
金普燮 | |
없음 | |
1911.07.11 ~ 1942.12 | |
전라남도 나주 錦洞 | |
全南 羅州 錦洞 | |
광주 | |
학생운동 | |
1920년대 후반 | |
애족장(1990) |
공적내용
"주도해왔던 성진회(醒進會)가 회원 중 이반자가 생겨 1927년 3월에 해체된 이후에도 주동 학생들의 항일활동은 각급학교 단위로 계속되어 나갔다. 그리하여 그는 광주고등보통학교 재학중 1928년 10월에 김몽길(金夢吉)·여도현(呂道鉉)·김상환(金相奐) 등과 함께 당시 광주시내 부동정(不動町) 소재 김시성(金時成)의 하숙집에 모여서 성진회의 사업을 추진하기 위한 방안에 관하여 협의하고 월 2회 정기적 모임을 갖기로 결정하였다. 그후 1929년 6월 동경(東京)에서 돌아온 장재성(張載性)은 성진회 해체 이후 분산적으로 지속되었던 광주지역 항일학생운동에 대하여 조직적 활동을 주장하였다. 이에 광주내 각학교 학생지도자들은 김기권(金基權)의 집에서 모여 '독서회중앙본부'를 조직하고 부서 및 결의사항을 정했는데 이때 그는 김상환과 함께 조사선전위원으로 선임되어 동지의 포섭 및 선전 보급의 일을 맡았다. 한편 동 본부는 조직확대를 위하여 하부조직으로서 각 학교 독서회를 조직하기로 하였다. 이러한 계획에 따라 그는 1929년 6월 무등산에서 광주고보생 20여명과 함께 광주고보독서회를 조직하였으며 이때 동회의 재정부위원으로 선임되었다. 또한 '독서회중앙본부'는 독서회원의 친목과 단결을 도모하는 한편 재정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학생소비조합을 설치하기로 하였는데 이를 추진하기 위하여 1929년 6월부터 독서회중앙본부 임원들과 함께 장재성의 집을 비롯한 여러 곳에서 협의하여 1929년 9월에 동 조합을 조직하였다. 이렇게 독서회를 중심으로 항일학생활동을 전개하던 중, 1929년 11월 3일 광주학생독립운동이 일어나자 그는 광주고보생 시위 대열의 선두에 서서 활약하였다. 이로 인하여 1930년 3월에 퇴학처분을 받았으며, 이어 일경에 체포되어, 광주학생독립만세시위운동에 대하여 1930년 5월 대구복심법원에서 금고 6월 집행유예 5년형을 언도받았다. 또한 독서회 관련에 대해서는 1930년 10월에 광주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 6월형을 언도받고 항소하여 1931년 6월에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2년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68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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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3권 240·264·1512∼1524·1611∼1624·1633∼1654·1667∼1708면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제1권 분책 717·720면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238면
기려수필 397·398면
판결문(1931. 6. 13 대구복심법원)
판결문(1930. 10. 18 광주지방법원)
판결문(1930. 5. 15 대구복심법원)
판결문(1930. 2. 26 광주지방법원)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9권 49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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