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달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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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달주 | |
姜達周 | |
없음 | |
1980.10.21 ~ 1960.10 | |
전라남도 나주 반남 석천 276 | |
전라남도 나주 반남 석천 276 | |
나주 외 | |
의병 | |
1910년대 후반 | |
애국장(1990) |
공적내용
강달주는 전남 나주(羅州)사람으로서 1907년 군대해산이 강행되자 의병운동에 참여하고자 하였다. 당시 전라도에서는 고광순(高光洵) 기삼연(奇參衍) 이석용(李錫庸) 등의 유생들이 구국 항일의 가치를 높이 들었다. 이때 심남일(沈南一)도 1907년 11월 1일 함평 신광면(咸平 新光面)에서 기의하였다. 강달주는 심남일의 의진에 가담하였다. 당시 심남일 의진의 부대 편성을 살펴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의병대장 심남일(沈南一), 선봉장 강무경(姜武景), 임만선(任萬善), 장인보(張仁甫), 중군장 안찬재(安贊在), 박사화(朴士化), 후군장 노병우(盧炳友), 나성화(羅聖化), 최우평(崔友平), 김성재(金聖載), 도통장 김도숙(金道淑), 통장 유치선(柳致先), 공진숙(孔盡淑), 군량장 이세창(李世昌), 호군장 강달주(姜達周), 정관오(鄭官午) 이어서 선봉장 강무경과 함께 격문을 작성하여 각지에 살포하고 의병을 모집하여 훈련시켰다. 1908년 3월 7일 강달주는 심남일 의진의 호군장으로 강진 오치동(康津 吾治洞)전투에서 일군 수백 명과 접전하여 첫 승리를 거두었고, 6월 25일에는 능주(綾州) 전투에서, 10월 9일에는 해남(海南) 성내(城內)에서 3백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진격하여 많은 왜적을 살상하는 등의 전과(戰果)를 올렸다. 1909년 5월 12일 의진은 보성(寶城) 천동(泉洞)에 주둔하고 보성 창의장(倡義將) 안규홍(安圭洪)에게 통지하여 석호산(石虎山)에서 회동하여 서로 협조할 것을 의논하였다. 이 때 강달주는 후군장 김성재와 함께 소를 잡아서 군사들에게 먹여 사기를 북돋웠다. 사기가 충천하여 산상(山上)에 깃발을 휘날리니 왜병 50여 명이 북을 울리며 싸움을 걸어와 접전 끝에 적 5명을 사살하였다. 8월 26일 심남일 의진의 휘하 장병들이 석정(石井) 전투에서 적과 접전할 때 첩자가 능주 일헌병대(綾州 日憲兵隊)에 밀통하니 적의 야습으로 거의 3년만에 가장 많은 병졸을 잃었다. 그 후 의병을 해산하라는 칙명이 내려 부득이 군사를 해산하고, 풍치(風峙)에서 피신하다가 심남일과 함께 5명이 체포되었다. 1910년 4월 4일 광주지방재판소에서 소위 폭동죄로 징역 5년형이 언도되고 그 후 공소(控訴)하였으나 5월 9일 형이 확정되었다. 투옥생활중에는 일본 헌병의 고문으로 하반신 발목이 불구가 되었으며, 출감 후 나주(羅州)군의 독립운동에 은밀히 참여하다가 3·1운동 후 영암군 시종면 봉소리(靈岩郡 始終面 鳳巢里)에서 은거생활을 하였다고 전한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로를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3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자료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제1권 104면
형사공소사건부 부산지방검찰청(;82. 9. 20)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1권 603 652면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2권 565 573 580 585 589 590 591 592 593 594 595 596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