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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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율 | |
金聿 | |
金律 | |
1882 ~ 1908.04.25 | |
전라남도 나주 文平 渴馬 | |
全南 羅州 文平 渴馬 | |
나주 외 | |
의병 | |
1900년대 중후반 | |
독립장(1995) |
공적내용
" 전남 나주(羅州) 사람이다. 나주에서 형인 김태원(金泰元;金準)과 더불어 거의한 뒤 기삼연(奇參衍) 의진에 참여하여 활동하다가 이후 분진(分陣)하여 의병장으로 활약하였다. 1905년 11월 「을사륵약(乙巳勒約)」으로 일제에 의해 자주적 외교권이 박탈되고, 이듬해 1월 통감부(統監府)가 설치되어 국왕의 통치권이 현저하게 손상되는 국망의 상황이 도래하였다. 이렇게 되자 우리 민족은 본격적인 반일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게 된다. 당시 그것은 크게 두 방향에서 전개되었다. 하나는 장기적인 실력양성운동으로 신문과 잡지를 통한 언론 활동, 종교와 그 단체를 통한 종교 활동, 각종 학회와 사립학교 설립을 통한 교육 활동, 국어와 국사 연구를 통한 학술 활동 등 각 방면의 국민계몽운동으로 진행되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즉각적인 무력투쟁인 의병운동으로 전개되고 있었다. 이같은 시기인 1906년 10월 5일 김 률은 형인 김태원과 함께 나주에서 봉기하여 활동하였다. 그는 기삼연의 문하생으로, 1907년 9월 기삼연을 중심으로 김용구(金容球)·김태원·이석용(李錫庸)·전해산(全海山)·심남일(沈南一) 등이 연합하여 결성한 호남창의맹소(湖南倡義盟所)에 가담하여 주력으로 활동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김태원과 함께 무장(茂長)·법성포(法聖浦)·고창(高敞)·장성(長城) 등지에서 일본군과 격전을 벌여 큰 전과를 올렸다. 특히 1907년 10월 29일에는 고창에서 일본군을 격퇴하였고, 같은 해 12월 7일에는 법성포 순사주재소를 습격하여 무기를 노획하여 무장을 강화하고, 그곳 사창(社倉)을 점령하여 저장되어 있던 양곡을 압수하여 군량미로 충당하였다. 그리고 그는 1908년 1월 3일 100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함평(咸平) 순사주재소를 공격 점령하여 무기와 금품을 노획하기도 하였다. 같은 해 1월 22일에도 그는 기삼연 의병장과 합동하여 400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재차 함평 순사주재소를 습격하여 일본인 파다야(波多野) 순사를 사살하기도 하였다. 같은 해 2월 2일 기삼연 의병장이 피체되어 순국한 뒤, 그는 김태원과 함께 기삼연 의진의 주력부대를 지휘하며 광주 일원 곳곳에서 일본군을 유격전술로 공격하여 전과를 올렸는데, 특히 창평(昌平)에서 길전승삼랑(吉田勝三郞)의 기병대를 공격하여 이를 대파하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같은 해 3월 30일 그는 광산(光山)군 송정읍(松汀邑)에서 피체되어 4월 25일 전사한 형 김태원의 시신을 확인하기 위해 가는 도중 탈출을 기도하다가 일제에 의해 피살,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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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제1권 73·76·77면
전남폭도사(전남경무과, 1913) 8·14·15·33∼35·45면
나주군지(나주군지편찬위원회, 1980) 150면
나주군인물지(나주군지편찬위원회, 1981) 132면
나주목지(정윤국, 1989) 67면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35면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제3집 312·343·555·556면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별집 제1집 693면
대한매일신보(1908. 5. 2)
한국독립운동사(국사편찬위원회) 제1권 647∼650면
죽봉청봉사적(필사본, 작성년도 미상)
함평군사(함평군사편찬위원회, 1984) 403·404면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337·613면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제2집 639∼64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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