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익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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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익수 | |
金益洙 | |
없음 | |
1900.07.16 ~ 1968.03 | |
전라남도 나주 公山面 新谷里 35 | |
京畿道 水原 | |
수원 | |
학생운동 | |
1920년대 중후반 | |
애족장(1990) |
공적내용
"전남 나주(羅州) 사람이다. 수원고등농림학교 재학중 1926년 여름에 동교생 10여명과 함께 학교 뒷산인 여기산(麗妓山)에 모여 민족사회에 이바지할 길을 모색하는 방법으로 농민대중을 계발하여 신사회 건설을 목표한 항일학생결사 건아단(健兒團)을 조직하였다. 그들은 먼저 농촌사회의 계발이 곧 독립운동의 기초가 된다고 보고 그들의 전문지식을 바탕으로 농민을 계몽 지도하는데 힘을 쏟았다. 그들은 수원군 안룡면(安龍面) 고견리(古牽里)를 비롯한 부근 여러 마을에 농민야학을 설립하여 농민의식을 고취하는 한편 민족의식을 고양하는 활동을 전개했는데 이때 단군 연호를 사용한 것이 후일에 말썽이 되었다. 그러던 중 1927년 9월에 북도(北道)지방을 수학여행하게 됐을 때 강원도 등지에서 일인의 대규모 농장을 본 건아단원들은 그 식민성 농장에 분개하고 민족농장 건설의 꿈을 키우기도 했다. 그리하여 1928년 6월에 건아단은 당시 일본 동경에 설치되어있던 조선농우연맹(朝鮮農友聯盟)에 가입하고 '조선인에 의한 조선농촌개발'이라는 조선농우연맹의 주장에 동조하여 활동하였다. 이는 건아단의 이상과도 합치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동년에 조선농우연맹이 국내에서 지방강연 등 계몽활동을 할 때, 수원고농의 학생이 연사로 참석하였다. 그런데 일제에 의해 강연활동이 중지되면서 여기에 연사로 참석했던 수원고농생 한전종(韓典鍾)은 학교에서 무기정학을 당하였다. 이때 건아단의 조직은 발각되지 않았으나 단원들은 사태를 중시하여 단명을 계림농흥사(鷄林農興社)로 개칭 위장하고 조직을 확대하여 나갔다. 그런데 건아단 출신으로 김해공립농업학교에 교사로 근무하던 김성원(金聲遠)이 건아단의 목적을 수행하던 중 일경에 검거되는 일이 일어났다. 때문에 1928년 여름에 계림농흥사는 다시 조선개척사(朝鮮開拓社)로 조직을 개편하였으나 사건이 확대됨에 따라 동결사의 조직과 활동이 드러나게 되어 1928년 9월에 전회원이 일경에 피체되었다. 이로 인하여 그는 수원고농에서 퇴학을 당했으며 18개월 동안 모진 고문을 당하다가 1930년 2월에 경성지방법원에서 면소 판결을 받았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0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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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일제침략하한국36년사 8권 907면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9권 674면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312면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3권 54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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