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월환
|
---|
나월환 | |
羅月煥 | |
羅月漢 | |
1912.10.14~1942.3.1 | |
전남 나주 약산 150 | |
미상 | |
일본, 중국 | |
광복군 | |
1930~40년대 | |
독립장(1963) |
공적내용
전남 나주(羅州) 사람이다. 그는 무정부주의자로서 일본에서 박 열(朴烈)과 함께 교류하면서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 1936년 중국의 육군군관학교를 졸업하고 한국혁명당원으로 활동하다가, 1937년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본국으로 송환되던 도중, 청도(靑島)에서 탈출하였다. 1939년 10월 중경(重慶)에서 한국청년전지공작대(韓國靑年戰地工作隊)를 결성하는데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다. 한국청년전지공작대는 중국중앙군관학교를 졸업한 장교 12명이 중심이 되어 중국의 군사기관에 복무하였거나 상해(上海), 만주(滿洲) 등지에서 독립운동에 종사하고 있던 청년지사 30여 명이 모여 조직하였는데, 그는 전지공작대의 대장으로 활약하였다. 이들 대원들은 중국에서의 항일전이 곧 우리의 독립전쟁이라 인식하고, 중국에 흩어져 있는 한국 청년들을 총집결시켜서 중국의 항일전을 도왔다. 1941년 1월 한국청년전지공작대는 광복군 제5지대로 편입됨에 따라 공작대장이었던 그는 광복군 제5지대장에 임명되었다. 광복군 제5지대는 서안(西安)에 본부를 두고 총사령부를 호위하면서 장병들을 훈련시켰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하남·화북성(河南·華北省) 등지로 나가 초모, 선전 및 첩보활동을 전개하였다. 1941년 5월에는 서안(西安)에서 군민위안 및 일선장병위문품 모집 공연을 하였는데 그는 이 대회주임으로 "국경의 밤", "한국의 1용사", "아리랑" 등을 공연토록 하여 크게 호평을 받았다. 그는 1942년 3월 31일까지 서안(西安)의 한국광복군훈련소에서 광복군을 훈련하였으나 동료간의 불화로 인하여 5지대 간부들에 의하여 암살되었다. 이에 따라 이 사건에 가담하였던 간부들은 중국전시4단에서 형을 받았는데 박동운(朴東雲)은 사형, 이하유(李何有)·김동수(金東洙)는 무기도형(無期徒刑), 이해평(李海平)·이도순(李道淳)·고여순(高如淳)은 15년도형, 김송죽(金松竹)·김용주(金龍珠)는 2년도형을 받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자료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357 358 361 373 374 379 441 472면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134면
무장독립운동비사 206면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제2권 586면
일제침략하한국36년사 12권 332 463 464 465 589면
일제침략하한국36년사 13권 84면
임시정부의정원문서(국회도서관) 776면
한국독립운동사(국사편찬위원회) 5권 66 74면
자료한국독립운동(추헌수) 3권 373면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4권 908면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6권 164 167 208 209 210 228 229 230 232 280 406 586면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별집 2권 511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