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공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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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공근 | |
朴恭根 | |
1901.2.14~1960.3.4 | |
전남 나주 경현 444 | |
全南 羅州 羅州 南門 33 | |
나주 | |
국내항일 | |
1920년대 | |
애족장(2004) |
공적내용
"1915년경 나주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1925년 2월 8일 나주에서 결성된 독립운동 단체 효종단(曉鍾團) 위원, 나주청년회(羅州靑年會) 의연금 모취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25년 4월에는 서울청년회에서 주도한 전조선노농대회(全朝鮮勞農大會) 준비위원, 1926년 2월 전남청년연맹(全南靑年聯盟) 집행위원, 1926년 11월 나주청년수양회(羅州靑年修養會) 위원 등으로 활동하면서 노농·청년운동에 참여하였다. 1927년 9월 7일 조선노동총동맹(朝鮮勞動總同盟)과 함께 조선농민총동맹(朝鮮農民總同盟)이 성립되자, 조선농민총동맹 전남지역 후보위원으로 선출되기도 하였다.
그 뒤 신간회(新幹會)가 결성되자, 신간회 나주지회에서 서무부장·지회장 등을 역임하였으며, 중외일보(中外日報) 기자로도 활동하였다. 1929년 11월 3일 광주학생운동이 발발하자, 나주지역 학생시위운동을 주도하였다. 신간회 나주지회에서 같이 활동한 양영택(梁永澤)·박동희(朴東熙), 나주농업보습학원(羅州農業補習學院) 학생인 유찬옥(柳贊玉)·홍민후(洪敏厚) 등의 동지들과 함께 광주학생운동이 발발한 직후 「대중이여, 학생 제군이여, 우리들은 얼마나 많은 강압과 폭압을 받고 있는가」라는 제목의 격문을 작성·인쇄하고 학생 동원계획을 세우는 등의 시위 준비를 하고 나주농업보습학교와 나주보통학교 학생들을 규합하여 11월 27일 나주 시장에서 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로 인해 일경에 체포된 그는 1930년 3월 5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석방 후 신간회 해소 직전인 1931년 5월 16일 서울 종로 중앙기독교청년회관에서 개최된 신간회 전체대회에서 중앙집행위원에 선임되기도 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4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자료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제13권 266∼267면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제14권 351면
日帝侵略下韓國三十六年史(국사편찬위원회) 제8권 534면
東亞日報(1925. 2. 6·2. 11·4. 11·11. 21, 1927. 9. 9, 1930. 1. 5·2. 28·3. 6, 1931. 5. 18)
豫審終結決定(光州地方法院, 1930. 2. 8)
判決文(光州地方法院, 1930. 3. 5)
韓國共産主義運動史(金俊燁·金昌順) 제2권 254면
韓國共産主義運動史(金俊燁·金昌順) 제3권 67·111면
韓國靑年運動史(鮮于基聖) 344·350면
光州學生獨立運動과 羅州(박찬승, 1998) 69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