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동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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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희 | |
朴東熙 | |
朴琪熏 | |
1906.3.13~1961.10.5 | |
전라남도 나주 羅州 南門 64 | |
全南 羅州 羅州 南門 64 | |
나주 | |
국내항일 | |
1920년대 | |
건국포장(1997) |
공적내용
"전남 나주(羅州) 사람이다.
1929년 전남 나주청년동맹(羅州靑年同盟) 지부장 겸 신간회(新幹會) 나주지회원(羅州支會員)으로 광주학생운동(光州學生運動)에 동조하여 나주장날을 이용하여 나주지역학생운동을 주도하였다.
전남 나주청년동맹 지부장 겸 신간회 나주지회원이었던 박동희는 1929년 11월 3일 광주학생운동으로 많은 학생들이 검거, 수감되자 이들을 석방시키기 위해 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심하였다.
우선 박동희는 신간회 회원 박공근(朴恭根) 등과 함께 나주농업보습학교(羅州農業補習學校) 및 나주보통학교(羅州普通學校) 학생들을 동원하여 시위운동을 일으킬 것을 계획하고, 같은 해 11월 27일 나주장날 거사하기로 합의하였다.
박동근 등은 같은 해 11월 26일 밤, '대중(大衆)이여! 학생제군(學生諸君)이여! 아느냐! 우리들이 여하(如何)한 탄압(彈壓)과 폭압(暴壓)을 받고 있는가를'이라고 쓴 선전문 약 2,000부를 인쇄한 후 학생들로 하여금 다음 날 새벽에 일반인들과 학생들에게 나누어 주어 거사에 참가할 것을 권유하도록 하였다.
거사 당일인 11월 27일 정오 경, 나주 장에는 수많은 시민과 학생들이 모여들었고, 박동희의 주도로 독립만세를 고창하는 한편 시내 전역을 돌며 행진하였다.
그는 이 일로 피체되어 1930년 3월 5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및 출판법으로 징역 10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7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자료
"判決文(1930. 3. 5 光州地方法院)
身分帳指紋原紙(警察廳)
光州學生獨立運動史(光州學生獨立運動同志會, 1974) 146∼148面
東亞日報(1930. 1. 5, 2. 28, 3. 6, 11. 25)
獨立運動史資料集(國家報勳處) 第13輯 266·267面"