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사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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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사화 | |
朴士化 | |
"朴士過,朴士弘 " | |
1880~1912.7.5 | |
전라남도 나주 知良 基村 | |
全南 羅州 田旺 不古村 | |
강진 외 | |
의병 | |
1910년대 | |
독립장(1998) |
공적내용
"전남 나주(羅州) 사람이다.
일제는 1905년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여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고 통감부를 설치하여 내정을 간섭하더니, 급기야 1907년 정미7조약으로 대한제국의 내정을 장악한 후 정규군인 진위대와 시위대를 강제 해산하였다. 이에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봉기하여 국권회복을 위해 일제와 항쟁하였다.
1907년 8월부터는 해산군인들이 의병진에 가담함으로써 1905년 을사조약 이후 거의했던 의병진과 함께 전국적인 항쟁으로 발전하였고 참여계층도 유림, 농민, 포수, 해산군인을 비롯하여 상인, 광부 등의 평민들이 대거 참여하여 국민전쟁의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당시의 의병전쟁은 처음에는 전기의병과 같은 대회전(大會戰) 방식이었으나 1906년 말부터는 소부대에 의한 유격전 방식으로 변해 갔다. 때문에 의병의 거점도 향교 같은 곳이 아니라 읍성(邑城)이나 산성이었고 나중에 유격전으로 변해가면서는 산악으로 옮겨갔다. 또한 평소 일제의 정책에 부화뇌동하던 친일관료와 일제에 기생하며 민족적 과제를 외면하던 부일배 역시 응징의 대상이 되었다. 따라서 의병활동 역시 일제와의 직접적인 전투 뿐 아니라 군자금 모집, 친일관료 응징 등으로 표현되었다.
아울러 의병진의 전력도 증강되어 전국 곳곳에서 일군과 치열한 교전을 벌였다. 일부 기록에 의하면 1907년 이후 1909년까지의 의병 전사자가 10만 명으로 알려질 정도로 국권회복을 위한 의병들의 항쟁은 처절한 것이었다.
이와 같이 국망의 사태가 도래하자 박사화는 1908년 2월 전남 함평(咸平)에서 거의한 심남일(沈南一) 의진에 참가하여 중군장(中軍將)으로 활약하였다.
심남일 의병장은 김준(金準:金泰元) 의병부대의 부장으로 활약하다가, 김준과 김준의 아우 김률(金聿)이 전사하자 스스로 대장이 되어 의병 진용을 재정비하여 의병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때 박사화는 중군장의 임무를 맡았다.
이들 의병부대는 같은 해 3월 강진(康津)에서 일본군 수백명과 오전 6시부터 밤 10시까지 접전을 벌여 수십명을 살상하고 다수의 무기를 노획하는 커다란 전과를 올리며 기세를 떨쳤다. 이후 이들은 남평, 능주, 영암, 나주, 장흥, 해남 등지에서 일본군을 격파하였다.
그밖에도 이들은 군자금을 모집하는 한편 친일 밀정과 관료들을 처단하기도 하였다. 나아가 같은 해 10월 능주에서 일군과 교전하는 등 1909년 가을까지 전남 나주, 영산포, 영암 등지에서 150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일본군과 의병전투를 전개하였다.
그런데 일제가 대한제국을 강제 점령하기 위한 최후의 수단으로 소위 '남한대토벌작전(南韓大討伐作戰)' 계획에 따라 호남의 의병들에 대한 공세를 가해왔다. 이에 박사화는 자신을 희생시켜 150여 명의 부하들을 구출하기 위해 자수한 뒤, 다음날 기회를 보아 탈출하여 의병항쟁을 전개하다가 다시 피체되었다.
그는 1910년 5월 19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소위 내란 및 살인죄로 사형을 받아, 1912년 7월 5일 형 집행으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8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자료
"獨立運動史資料集(國家報勳處) 別集 1輯 813面
의병들의 항쟁(민족사바로찾기국민회의, 1995) 167面
靈岩(在京靈岩郡鄕友會, 1991) 創刊號 43∼46面
梅泉野錄(黃玹) 489面
全南暴徒史(全南 警務課) 17·89·115·116·124·126·135面
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第1卷 538·603·645面
獨立運動史資料集(國家報勳處) 第2輯 573·577面
受刑人名簿(光州地方法院 檢事局)
朝鮮獨立運動(金正明) 第1卷 35·74·76·83面"