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인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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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찬 | |
朴仁贊 | |
1878~1910.6 | |
전라남도 나주 芽界 水洞 | |
全南 羅州 芽界 水洞 | |
함평 외 | |
의병 | |
1910년대 | |
애국장(2000) |
공적내용
"전남 나주(羅州) 사람이다.
나성화(羅成化)의진에 참여하여 활동하다가 체포되어 교수형을 받고 순국하였다.
나주군 왕곡면(旺谷面) 출신의 나성화 의병장은 1907년 정미7조약으로 국권이 기울어가자 일제를 이땅에서 몰아내기 위해 박영근(朴永根), 유종환(兪鍾煥) 등과 함께 거의하였다. 그리하여 400여 명의 군사를 규합하고 자신은 의병장에 추대되었다.
그후 효과적인 대일항쟁을 위해 심남일(沈南一)의진과 합진하고 자신은 후군장에 선임되어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심남일의진은 1908년 3월 전남 함평(咸平), 이어 4월에는 장흥(長興), 6월에는 능주(綾州), 7월에는 영암(靈岩), 10월에는 해남(海南) 등지에서 일본군을 격파하는 등 의세를 떨쳤다.
1909년 4월 나주군 죽포면(竹浦面)에서 일본군 고막원분견소 파견대와 접전을 벌이는 등 전남 일대에서 활동하였다.
박인찬은 이와 같은 나성화의진에 소속되어 순독(巡督) 및 보초감독(步哨監督)의 직임을 맡아 대일항쟁의 선봉에 섰다. 박인찬은 1909년 7월 군사들과 함께 전남 무안부(務安府) 삼향면(三鄕面)에서 일본인 율산학길(栗山鶴吉)을 처단하고 군자금을 모집하는 등 주도적으로 활동하였다.
그러나 일제가 소위 남한대토벌작전을 전개하자 의병활동은 더욱 어려워지게 되었다. 결국 박인찬은 후일의 재기를 기약하며 자수하고 말았다.
그는 1910년 4월 12일 대구공소원에서 소위 폭동, 살상 등으로 교수형을 받고 상고하였으나 5월 16일 고등법원에서 기각, 교수형이 확정되어 형 집행으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자료
"統監府來案(奎章閣 所藏) 第1卷 1909∼1910年
獨立運動史資料集(國家報勳處) 別集 第1輯 868·869面
內閣告示(奎章閣 所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