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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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섭 | |
朴宗燮 | |
1880~미상 | |
전라남도 나주 | |
전남 나주 | |
서울 | |
의열투쟁 | |
1910년대 | |
애족장(2015) |
공적내용
"1905년 서울에서 기산도(奇山度) 등과 을사오적(乙巳五賊) 등을 처단하는 계획에 참여하여, 친일 관료 이민승(李敏承)과 이근택(李根澤)을 처단하려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기산도는 1905년 을사늑약(乙巳勒約)이 체결되기 전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한국에 와서 조약의 조인을 위한 음모를 꾀하고 있음을 간파하고, 이지용(李址鎔)ㆍ이근택ㆍ이하영(李夏榮)ㆍ박용화(朴鏞和)를 4간(四奸)이라 규정하고 이들을 처단할 뜻을 세웠다. 정순만(鄭淳萬)ㆍ이석(李石)의 지휘를 받아 1905년 음력 9월 새문 밖 국민교육회(國民敎育會)의 연회 자리에서 손효경(孫孝慶)과 함께 4간을 처단하려 하였으나, 이하영만 있어 거사를 일단 보류하였다. 이후 이민승을 처단할 계획을 세우고, 박종섭 등 7인이 칼ㆍ포(砲)ㆍ몽둥이를 각기 소지하고 이민승의 집에 들어가려 하였으나, 집안 사람에게 발각되어 실행하지 못하였다.
박종섭은 기산도ㆍ박경하ㆍ안한주ㆍ이종대와 함께 종로에서 이근택을 응징하려 했으나, 그를 보호하는 무리들이 많아서 거사에 착수하지 못하였다. 1905년 11월 18일 아침 박종섭 등 결사대는 전부터 모이던 서울 중서(中署) 관내 이동(泥洞)에 소재한 한성모(韓聖模)의 집에서 을사늑약 체결에 찬성한 적신(賊臣)들을 처단할 거사를 준비하던 중 경찰대에게 체포되었다.
1906년 5월 13일 평리원(平理院)에서 이른바 모살죄(謀殺罪)로 징역 2년 6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자료
"判決文(平理院 : 1906. 5. 13)
大韓帝國官報(1907. 12. 3)
駐韓日本公使館記錄(國史編纂委員會, 1992) 제24권 291면
독립운동사(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6) 제7권 147~149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