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석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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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석래 | |
宋錫來 | |
"宋敬煥,宋京煥 " | |
1876.6.17~1910.9.15 | |
전라남도 나주 多侍 松村 501 | |
全南 羅州 多侍 松村 501 | |
장성 외 | |
의병 | |
1910년대 | |
애국장(1996) |
공적내용
"전남 나주(羅州) 사람이다.
1907년 일제는 정미7조약을 강제체결하여 대한제국의 군대를 강제 해산하였다. 이에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봉기하여 국권회복을 위해 일제와 항쟁하였다. 당시의 의병봉기는 같은 해 8월 해산군인들이 대거 의병진에 가담함으로써 전국적인 항쟁으로 발전하였고 참여계층도 유림·농민·포수·해산군인을 비롯하여 상인·광부 등의 평민들이 대거 참여하여 국민전쟁의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송석래는 이와 같은 국가 존망의 상황에서 김태원(金泰元:일명 金準) 의진에 참여하여 중군장으로 활동하였다. 의병장 김태원은 1907년 전남 장성에서 거의한 기삼연(奇參衍) 의병장의 호남창의회맹소(湖南倡義會盟所)에서 선봉장으로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특히 같은 해 12월 함평주재소를 습격하여 일인 순사를 사살하였고 추격하는 일군과 수 차례에 걸쳐 접전을 벌여 일군 지휘자 천단 조장(川端 曹長)과 부하들을 사살하는 등 신출귀몰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송석래는 이와 같은 김태원 의진의 중군장으로서 전남 영광(靈光)의 굴수산(屈殊山)에서 일본군 장교 2명을 비롯하여 일본 병졸 수십명을 사살하는 등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 또한 1908년 1월에는 무동촌(舞童村)에서 일본군과 교전하여 적장 길전승삼랑(吉田勝三郞)을 사살하는 등 나주·영광·광주·함평 등 전남 일대를 누비며 맹위를 떨쳤다. 그러나 일본군의 집요한 추격을 받고 마침내 광주 어등산(魚登山) 전투에서 김태원 의병장과 함께 전사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6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자료
"湖南節義錄(湖南節義錄刊所, 1964) 第8卷 87面
羅州郡人物誌(羅州郡誌編纂委員會, 1981) 125面
韓國獨立史(金承學) 下卷 342面
通文(羅州鄕校, 19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