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영택
|
---|
양영택 | |
梁永澤 | |
1907.10.27~1982.3.4 | |
전라남도 나주 北門 107 | |
全南 羅州 羅州 北門 107 | |
나주 | |
국내항일 | |
1930년대 | |
애족장(1995) |
공적내용
"전남 나주(羅州) 사람이다.
1929년 신간회(新幹會) 나주지회(羅州支會)의 서무부 간사로 활약하면서 광주학생운동 때 나주지역의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그는 나주농업보습학교 재학 중 학우인 유찬옥(柳贊玉)·홍민후(洪敏厚) 등과 함께 일제 식민지 통치의 부당성을 이론적으로 체득하면서 민족의식을 길러 갔다.
그러던 중 1927년 2월 민족협동전선체로서 신간회가 결성된 이래 나주지회가 1927년 9월 설립되자 이 때 그는 신간회 나주지회에 참가하였으며, 1929년 8월 임원 개선때 나주지회 서무부 간사로 선출되었다.
당시 나주 지역은 특히 일본인의 침탈이 심했던 곳으로 일찍부터 식민지 사회의 모순이 첨예하게 나타나고 있었다. 그리하여 이 지역에서 심화된 한·일간의 민족모순은 1929년 10월 30일 나주역에서 기차통학생들 사이의 충돌로 표현되었고, 이것은 급기야 광주학생운동의 발단을 이루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만세시위에 참가했던 다수의 학생들이 일제에 피체되자, 그는 학생들의 석방을 위해 다방면에 걸쳐 힘을 쏟았다.
또한 11월 3일 광주에서의 학생만세시위를 각처로 확대시키기 위해 나주지역의 농업보습학교와 보통학교 학생들을 지도하면서 동년 11월 17일 나주읍 장날을 이용하여 학생들을 중심으로 만세시위를 벌이기로 계획을 세웠다.
그런데 계획에 차질이 생겨 거사 일을 11월 27일로 바꾸는 한편 학교 휴식시간을 기하여 양 교의 학생들이 만세시위를 벌이도록 계획을 변경하였다. 그는 11월 26일에 격문을 작성하는 한편 신간회 나주지회의 등사기를 이용하여 격문 2천 부를 인쇄하였으며, 거사 당일인 11월 27일 아침 농업보습학교와 보통학교 5·6학년생 2백여명을 동원하여 만세시위를 거행하였다. 이 때 시위 학생들은 격문을 살포하는 한편 '조선민족 만세'와 '조선학생 만세' 등을 고창하였으며, 장날에 모인 다수의 군중들이 가세하면서 만세시위는 더욱 고조되었다.
이 일로 그는 일경에 피체되어, 1930년 3월 5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10월을 받았고 1930년 10월 9일 다시 대구복심법원에서 소위 상해죄(傷害罪)로 징역 4월을 추가받아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자료
"판결문(1930. 3. 5. 광주지방법원)
신분장지문원지(경찰청)
신간회연구(이균영) 234·612면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제13집 266·267면
조선일보(1929. 8. 18)
예심종결결정서(1930. 2. 8. 광주지방법원)
광주학생독립운동진원기념비(1981. 10. 28 건립)
동아일보(1930. 1. 5, 3.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