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태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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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태성 | |
梁泰成 | |
1911.12.12~1940.5.16 | |
전라남도 나주 全南 羅州 羅州 錦溪 | |
東京 荒川邑 南斗住町 | |
광주, 일본 | |
일본방면 | |
1930년대 | |
애족장(2007) |
공적내용
"전남 나주출신으로 1929년 광주고등보통학교 재학 중 광주학생운동에 참가하였다. 양태성은 학교 내부에서 협청(協靑) 조직을 동원시켜 전국적으로 동맹휴학을 확대 강화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그러나 광주학생운동이 일제의 탄압으로 인해 소강상태에 들어가고 주도자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가 있을 때 양태성은 학교당국으로부터 퇴학처분을 당하고 일본 동경으로 건너갔다.
일본에서 양태성은 노동운동에 참여하면서 일본노동조합전국협의회[全協]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또한 그는 1932년 7월 일본공산당에 가입하여 북부지구의 책임자가 되었다. 일본에서 노동운동과 항일운동으로 여러 차례나 검거될 뻔 하였지만 그럴 때마다 이름을 바꾸어 일제의 검거를 피할 수 있었다.
1933년 말 양태성은 군수공장을 중심으로 동지를 규합하고 있었다. 그런데 일제 특고는 재일 한인 노동운동에 대해 주목을 하고 있다가 1934년 4월 18일 일본공산당 조직원으로 북부지구 책임자인 양태성이 가두에서 연락활동을 하고 있을 때 붙잡았다. 동경 상야경찰서(上野警察署)에 검거된 양태성은 약 5개월 동안 엄혹한 취조를 받고 1934년 8월 15일 검사국에 송치되었다. 그후 1936년 2월 21일 동경형사지방재판소(東京刑事地方裁判所)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3년을 받고 옥고를 치른 후 1938년 9월 2일 출옥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7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자료
"身分帳指紋原紙(警察廳)
獨立運動史資料集(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別集3 471면
조선중앙일보(1934. 5. 24)
東亞日報(1934. 5. 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