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영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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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영채 | |
尹榮采 | |
1886.3.5~1908.4.3 | |
전라남도 나주 山浦 新道 99 | |
全南 羅州 山浦 新道 996 | |
나주,보성 | |
의병 | |
1910년대 | |
애국장(1991) |
공적내용
"전라남도 나주(羅州) 출신이다.
청일전쟁·노일전쟁에 승리한 일본은 한반도에서의 국제적 우위를 점하게 되었다. 일찍이 은밀하게 한반도 식민지화를 추진해 오던 일본은 본격적으로 한반도에서의 정치적·경제적 침탈행위를 서슴치 않게 되었다.
그 제일보가 이른바 1905년의 을사조약이다.
윤영채는 그러한 일제의 야욕을 분쇄하기 위하여 의병운동에 참여하여 나주(羅州)·화순(和順)·보성(寶城) 등지에서 활약하였다고 한다.
1907년 정미7조약(丁未七條約)에 이어 군대마저 일제의 책동에 의하여 해산되었다.
이때 일찍이 윤영채가 활동을 전개하던 보성 일대에서 담살이 안규홍(安圭洪)을 중심으로 의병운동이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윤영채는 자연스럽게 안규홍의 의지에 입대하여 활동하였다.
이들의 활동을 주목하여 오던 일군은 보성군 조성(鳥城)에서 벌교·순천을 연결하는 토벌진을 구성하여 안규홍 의진을 포위 섬멸하려 하였다.
의병장 안규홍은 담살이로 뼈를 굳혀 왔기 때문에 평소 초로 지리(樵路地理)에 밝은 인물이었다.
1908년 2월 적이 정시적(定時的)으로 출동 수색하는지라 적의 행로를 시간적으로 계산하여 파청(巴靑, 보성 동쪽 8키로 지점)의 험지에 복병하였다가 기습 공격할 작전을 구상하였다.
마침 적의 최강의 병력을 자랑하는 수호(水戶)·평정(平井) 부대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들이닥쳤다. 이들 2부대가 최험지(最險地)에 들어 왔을 때 의병 부대 복병들은 일제 사격을 가하였다.
당황한 일군들이 생로를 찾아 도주하려 하자 의병들은 앞길을 막고 맹사격을 가하였다. 일군의 두 부대장이 쓰러지고 전군이 복멸하여 의병부대는 적의 무기와 서류 일체를 전리품으로 노획한 후 개가를 부르면서 유유히 보성군 문덕면의 대원산(大院山)중으로 들어가 호군( 軍) 하였다. 이것이 '파청대첩'이다.
이 전투 이후 일군들은 담산의진을 의병부대 중 최강 부대로 지목하게 되었다. 따라서 적의 공격 목표가 될 수밖에 없었다.
4월 3일 대원산에 호군하고 있던 의진은 왜군과 크게 접전하였다. 이 전투에서 윤영채는 교전 중에 전사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0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자료
"파평 윤씨 세보
전남도지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1권 607·608면
남평향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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