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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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계춘 | |
李啓春 | |
1914.9.7~1989.2.19 | |
전라남도 나주 文平 雲峰 368 | |
全南 羅州 文平 雲峰 368 | |
나주,광주 | |
학생운동 | |
1930년대 | |
건국포장(1995) |
공적내용
"전남 나주(羅州) 사람이다.
1926년 11월 조국의 독립, 사회과학의 연구, 식민교육체제 반대를 목적으로 성진회(醒進會)를 조직한 장재성(張載性)은 1929년 6월 동경중앙대학(東京中央大學)을 중퇴하고 귀향하여 성진회의 명칭을 독서회중앙본부(讀書會中央本部)로 개칭하였다. 또한 각 학교별로 핵심지도부를 조직한다는 방침에 따라 광주고보(光州高普)는 자신이 맡고, 광주농업학교는 문승수(文升洙), 광주사범학교는 임종근(林鍾根), 광주여자고보(光州女子高普)는 장매성(張梅性)을 직책으로 하는 학교별 독서회를 결성하여 학생들을 조직하고 이론적으로 훈련시켜 항일독립운동을 추진해 나갈 것을 계획하였다.
이에 따라 1929년 6월 광주농업학교 2학년에 재학 중 광주농업학교 독서회에 가입한 그는 사회주의 연구, 동지 규합, 일제로부터의 독립을 목적으로 토론 활동을 전개하였다.
1929년 10월 30일 광주고보의 한국인 학생들과 광주중학 일본인 학생들의 충돌사건을 계기로 학생운동이 전개되자, 11월 3일 광주고보 및 광주농업학교 학생 약 3백여 명과 함께 광주 읍내를 시위 행진하면서 광주도립병원(光州道立病院) 앞에서 일본 경찰과 대치하다가 광주교를 돌아 해산하였다. 또한 같은 달 12일에 전개된 제2차 투쟁에도 광주농업학교 학생 2백여 명과 함께 식민지 노예교육의 철폐와 조선인 본위의 교육제도 확립, 언론·집회·결사·출판의 자유 획득 등을 슬로건으로 내세우며 광주고보 부근까지 시위행진을 전개하다가 일경에 피체되었다.
그 후 약 11개월 동안 옥고를 치른 끝에 1930년 10월 18일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광주지방법원에서 금고 6월 집행유예 5년을 받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자료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238면
광주학생독립운동사(광주학생독립운동동지회, 1974) 106∼118면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제1권 분책 720∼724면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제9권 501면
동아일보(1930. 10. 19)
신분장지문원지(경찰청)
조선일보(1930. 10. 10, 10. 12, 10. 19, 1931. 5. 30)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제13집 264·1611∼1624·1633∼1654면
판결문(1930. 10. 18. 광주지방법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