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도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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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도돌 | |
林道乭 | |
1887~1910.06 | |
" 전라남도 나주 侍郞 內洞 " | |
全南 羅州 侍郞 內洞 | |
무안외 | |
의병 | |
1910년대 | |
애국장(2000) |
공적내용
"전남 나주(羅州) 사람이다.
나성화(羅成化)의진에 참여하여 활동하다가 체포되어 교수형을 받고 순국하였다.
나주군 왕곡면(旺谷面) 출신의 나성화의병장은 1907년 정미7조약이 체결되고 광무황제가 강제퇴위되는 등 국권이 기울어가자 일제를 이땅에서 몰아내기 위해 박영근(朴永根), 유종환(兪鍾煥) 등과 함께 거의하였다.
그리하여 400여 명의 군사를 규합하고 부장에 정인면(鄭仁勉), 도집사(都執事)에 양재룡(梁在龍), 호군(護軍)에 정두면(鄭斗勉) 등을 선임하고 자신은 의병장에 추대되어 진용을 갖추었다.
그후 효과적인 대일항쟁을 위해 심남일(沈南一)의진과 합진하고 자신은 후군장에 선임되어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심남일의진은 1908년 3월 전남 함평군(咸平郡) 강진면에서 적병과 조우하여 오전 6시부터 밤 10시경까지 치열한 접전을 전개하였다. 이어 4월에는 장흥(長興), 6월에는 능주(綾州), 7월에는 영암(靈岩), 10월에는 해남(海南) 등지에서 일본군을 격파하는 등 의세를 떨쳤다.
1909년 심남일의병장이 병을 얻어 활동이 소강상태에 접어들자 나성화의병장은 다시 분진하여 독자적인 의병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리하여 1909년 4월 나주군 죽포면(竹浦面)에서 일본군 고막원분견소 파견대와 접전을 벌였다. 이어 6월에는 나주군 모계면(茅界面)에서 일본군 파견대와 교전하는 등 전남 일대에서 활동하였다.
임도돌은 이와 같은 나성화의진에 소속되어 대일항쟁의 선봉에 섰다. 임도돌은 1909년 7월 군사들과 함께 전남 무안부(務安府) 삼향면(三鄕面)에서 일본인 율산학길(栗山鶴吉)을 처단하고 군자금을 모집하는 등 주도적으로 활동하였다.
그러나 일제가 한국병탄을 위한 마지막 단계로서 대규모의 병력으로 소위 '남한대토벌작전'을 전개하자 의병활동은 더욱 어려워지게 되었다. 결국 임도돌은 후일의 재기를 기약하며 자수하고 말았다.
그는 1910년 4월 12일 대구공소원에서 소위 폭동, 살상 등으로 교수형을 받고 상고하였으나 5월 16일 고등법원에서 기각, 교수형이 확정되어 형 집행으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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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獨立運動史資料集(國家報勳處) 別集 第1輯 868·869面
內閣告示(奎章閣 所藏)
統監府來案(奎章閣 所藏) 第1卷 1909∼1910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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